화면이 넓은 맥북으로 갈아 탄지 6개월도 더 되었다. 아주 만족스럽다. 한 가지 신경쓰이는 것이 있다면 책상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옛 맥북이다. 이번 주엔 당근마켓으로 팔아야지, 이번주엔 진짜 해야지 마음만 먹은게 반년째. 그 사이에 새로운 맥북 M1이 등장해서 값은 뚝 떨어졌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외부 스티커를 깔끔하게 때어냈으니, 판매 준비는 거의 다 한 셈이었다. 함께 했던 나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새로 태어날 기회를 주기만 하면 된다. 포맷을 하기 위해 유튜브가 시키는 대로 전원 버튼을 누른 뒤, 해리포터가 다이애건 엘리로 들어가듯이 비밀의 키보드 자판을 몇개 누르니 4년간 한번도 보지 못했던 신비한 화면이 나왔다. 그리곤 분명 유튜버와 같은 행동을 반복했는데 어쩐 일인지 모든 디스크가 날아가서 맥북이 그저 하드디스크에 알루미늄 커버가 예쁘게 씌워진 신묘한 물건이 되어버렸다. 정말이지 마법처럼 말이다. 다시 켜보려니 이번엔 더욱 놀랍게도 빈 폴더에 물음표가 등장 할 뿐 익숙한 사과로고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나는 초기화를 하다못해 아예, 맥북을 맥북답게 만들어 주는 최소한의 장치 ‘시동 디스크’를 날려버린 것이었다.
복잡한 마음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는 심정으로 애플 고객지원센터 도움을 요청했다. 나의 경우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통화를 하거나 메시지로 내용을 주고받은 것이었다. 아무래도 메시지는 답답할 것 같아서 통화를 신청하니 바로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그니까… 제가 포멧을 하려다가 뭔가 잘못 되었는지, 빈 폴더가 보여요. 켜지지 않는 것 같아요..” 상담사는 프로였다. 어떻게 그 상태가 되었는지 차근차근 묻고 “고객님, 갑자기 켜지지 않아서 당황하셨겠어요. 지금 저와 함께 몇 가지를 진행해볼 거예요. 따라 해주시면 됩니다.”라고 답했다. 함께 해본다는 말이 이렇게 위안이 될 수 없었다. 그러겠다고 말하니 비밀스럽고 믿음이 가는 키보드를 조작을 시켰고 나는 따라했다.
"네! 전원 버튼 누르고 바로 Command랑 R 동시에 눌렀어요!" 수월하게 진행되는 듯 했으나 바로 문제가 생겼다.
"이제 상단에 ‘보기 옵션’이 보이실 거예요. 그걸 눌러보시겠어요?”
“네? 보기 옵션이요?”
“네 왼쪽 상단에 닫기 창 아래 보기 옵션이 안보이시나요?”
“없는데요??”
“있을텐데….”
“없어요(거의 울상)”
“그러면, 제가 지금 원격 조정을 신청해볼게요. 전화 받고 계신 휴대폰으로 알림이 가면 화면 허용을 눌러주세요.”
직원은 아이폰 카메라를 켜라고 했고 난 그걸로 화면을 비춰 문제 상황을 보여주었다. 그 후로 약 40분간 나를 어르고 달래며 “원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예요”, “이제 그걸 눌러보세요.”, “아뇨! 그건 건들지 마세요!”하며 시스템 복원에 성공했다. 시스템 재설치가 시작되어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구간에 이르자, 상담사는 야무지게 나의 건강을 챙겨주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코로나 19조심하시고, 다시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찾아주세요. 🙂" 애플이 비싼 값을 이제야 하는구나 싶다. 이 분의 월급을 줘야 한다면 맥북 값이 오르는게 맞다.
통화가 끝나자, 등록했던 메일로 내가 진행했던 수리 과정의 요약서가 도착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다시 고객센터에 요청해야 한다면 직원이 바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케이스 번호 링크가 있었다. 내가 수리했던 과정과 관련된 고객지원의 FAQ링크도 함께 알려주었다. 무척 깔끔한 경험이다. 고객센터 리뷰를 찾아보니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많았다. 아이폰에 문제가 생겨서 전화를 했는데 직원이 아이폰 버전을 묻고는 “최신 아이폰을 사셨네요! 부러워요.”했다거나, “당황하셨겠어요. 걱정마세요. 같이 해결할 수 있어요!”하며 용기를 주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다른 서비스 센터는 상담사가 스스로 엄청 낮춰서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는데 애플 고객지원의 상담사는 수평적이어서 좋았다는 후기도 눈에 띄었다.
제품은 구매 순간 찰칵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제품을 구매할지 말지 고민하고, 구매 경로를 정하고, 결제하고, 배송을 기다리고, 드디어 개봉한 후 사용하며 나의 것으로 익숙하게 만들고, 시간이 오래 되어서 수리를 하고, 아쉽게 폐기를 하는 과정이 모두 제품 경험이다. 제품을 하나의 영화라고 생각해봐도 좋겠다. 트렌디한 광고에 설득당해 구매했지만, 막상 받아서 사용하니 AS가 안된다거나, 교환/환불이 어려운 경우는 마치 예고편은 완벽했으나 허무하게 끝나는 영화같다. 제품을 시퀀즈로 바라본다면 언제 이 제품이 가장 매력적일지, 언제 사용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찾게 될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고객 지원 센터에 전화를 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그들와 함께라면 방구석에서도 벽돌이 된 맥북을 고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기업의 관점에서 사용 과정에서는 매출이 계속 나지 않기 때문에 사용 경험까지 완벽하게 서비스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 충성도를 높이고 싶은 것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어느 분야건 재구매는 일어난다. 자주 신던 신발이 낡았다면 비슷한 것이 또 필요할 것이고, 이틀 전 샀던 시리얼을 또 살 일도 생긴다. 이 때 같은 브랜드의 신발을, 같은 시리얼을 살 것인지 여부는 사용 경험에 달려있다. 신발을 산지 얼마 안되어서 찢어졌지만 완벽하게 무상수리를 해준 경험이 있다면, 분명 또 같은 브랜드를 구매할 것이다. 반면 시리얼의 포장지가 너무 뜯기 어려워 애쓰다가 퍽 찢어져버려서 바닥이 난장판이 되었다면 결코 다시 사지 않을 수 있다. 제품을 시퀀스로 바라본다면 고객은 구매할 때만 고객이 아니다. 고객은 제품을 구매한 후에도 고객이다. 오히려 구매할 때는 확실한 내 편이지만, 구매 후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고 떠난다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더 무서운 고객이 된다.
2020.4.1 씀